1. 우파니샤드의 기본개념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자연계의 모든 현상과 존재들은 하나의 근원적인 실재(브라흐만)로부터 나왔으므로 개별적인 존재의 참본질(아트만)은 궁극적으로 우주의 본질(브라흐만)과 동일하다고 생각하였으며, 명상과 수행을 통해 이러한 진리를 깨닫게 되면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운 해탈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윤회하게 하는 원동력의 실체를 업(業, Karman)이라고 보며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이 업(業)에 의해서 생겨나는 윤회로부터의 자유, 즉 해탈이라고 본다. 해탈이란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본질을 깨닫고,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진리를 직관하여 궁극적으로 브라흐만과 자아를 합일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다양한 정신적인 수행을 통해 우주와 자아에 대한 본질적인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자기가 곧 최고의 절대적 실재인 브라흐만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사람은 모든 욕망과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카르마로부터 자유로워지며 물질적인 것에 대한 모든 욕망이나 본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나 자신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자유며 집착과 욕망, 그리고 일체의 업(業)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겠는가? 우파니샤드는 그 문제를 바로 인간 내부로의 탐구에서 시작하여 인간 자신에게서 찾으려 한 최초의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우파니샤드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몇 가지 기본적인 개념과 사상이 있는데, 그중 가장 주요한 단어가 아트만(我)과 브라흐만(梵)이다.
2. 브라흐만(Brahman)
브라흐만은 다양하고 다원적인 현상계의 기저에 놓인 불변의 실재이다. 브라흐만은 우주의 바탕이자 불가멸이고 궁극적이기 때문에 다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다. 브라흐만은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고 마음이 생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마음이 생각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브라흐만은 변화하는 세계의 모든 부분과 측면의 기저에 놓인 불멸의 불변하는 실재이다. 우주에 있는 무엇이든 모든 사물들의 내면에는 주재자가 계신다. 이것이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브라흐만의 진실이니, 마음의 운동에 있어서 나타난 힘은 모두 브라흐만의 힘이다.
불멸하는 것이 실재이다. 마치 타는 불로부터 무수한 불꽃이 위로 날아오르듯이, 불멸자의 심연으로부터 모든 것이 일어나며, 그들은 다시 불멸자의 심연으로 내려간다.
저 존재는 스스로 빛나며, 무형체이다. 그는 모든 것의 안과 밖에 머문다. 그는 태어나지 않으며, 청정하고 가장 큰 것보다 크며, 호흡도 없고, 마음도 없다.
실재에 대한 우파니샤드의 개념이 한편으로는 변화하는 세계와 다른 편으로는 불변의 브라흐만이라는 이원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한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끊임없이 우파니샤드는 브라흐만만이 유일한 실재라는 일원론을 강조하는데, 즉 진흙으로 만들어진 대상들이 다만 그 이름과 형태에서만 서로 다르듯이, 변화의 세계는 다만 이름과 형태의 세계이며, 그 실체는 영원, 불멸의 브라흐만이다.
"다만 말 혹은 언어만으로 변화가 일어나며, 실재에 있어서 변화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단지 이름이며, 진흙만이 실재이다."
브라흐만은 감관과 이지의 세계와 달리 이름과 형태를 초월해 있다. 따라서, 무엇으로도 브라흐만을 적극적으로 묘사할 수 없으며, 단지 브라흐만이 아닌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기술(記述)이란 관계인데, 브라흐만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브라흐만은 기술될 수 없다. 그러나 브라흐만은 모든 존재에 편재한 힘이다. 이 점은 다음의 인용에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브라흐만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자이며, 마음도 그에 도달할 수 없어 당혹하여 달아난다.
말로 표현될 수 없으나 그것에 의해 혀가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브라흐만임을 알라. 브라흐만은 인간이 예배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마음으로써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으나, 그에 의해 마음이 이해하게 되는 것, 그것이 브라흐만임을 알라. 브라흐만은 인간이 예배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눈으로 그것을 볼 수는 없으나 그에 의해 눈이 보게 되는 것. 그것이 브라흐만임을 알라. 브라흐만은 인간이 예배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호흡이 그것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에 의해 호흡이 이끌려지는 것. 그것이 브라흐만임을 알라. 브라흐만은 인간이 예배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브라흐만은 표현할 수 없고,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생각도 할 수 없는, 모든 존재의 기반이다. 브라흐만은 남성(he)도 아니고, 여성(she)도 아닌 중성(it)다. 브라흐만은 인간이 숭배하는 어떠한 유일신이나 다신들과도 동일시될 수 없다. 브라흐만은 감관이나 이지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고, 최고의 신비적 직관의 섬광에서 체험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3. 아트만(Atman)
소란스럽고 격동하는 내적 세계의 가운데 불변하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을 모든 변화에 대한 고요하고 불멸하는 증자(Witness)인 아트만이라고 불렀다. 아트만은 인간의 가장 내면의 자아로, 끊임없는 변화에 종속되는 경험적 자아(Empirical ego)와 혼동되어선 안 된다.
소금 덩어리를 물에 던지면, 녹아버려서 다시 집어낼 수 없지만, 그 물을 맛보면 짜갑게 느끼듯이, 오, 마에트리아여, 개아(個我)가 해소될 때, 그것이 무한하고 초월적인 청정한 의식이며 영원한 것이다. 개체성이란 무지 때문에 참나를 현상적으로 나타난 요소들과 동일화함으로써 일어난다. 신성한 빛 속에서 나의 의식이 사라질 때 그것도 사라진다. 참나의 의식이 있는 곳엔 개체성도 더 이상 없다.
아트만은 태어나지도 창조되지도 않는 순수한 영혼이며, 영원하다.
아트만은 ‘neti neti’라고 기술된다. 그것은 인식될 수 없으므로 불가사의하다. 그것은 소멸되지 않고, 잡혀지지 않으며, 무한하다.
아트만은 인간 속에서만 아니라 바다, 별, 나무, 천둥, 새, 그리고 짐승 등 모든 존재 가운데 존재한다. 우주 속에 있는 것이면 그 무엇이든 모든 사물들의 중심에 아트만이 있다.
아트만은 모든 존재의 주인이다. 마치 수레의 살들이 테와 축에 의해 결합되듯이, 모든 존재들, 모든 생명들, 모든 신들과 세계들이 아트만에 의해 통일된다.
미묘한 본질이며, 만물이 그 안에 존재하는 그것이 바로 진리이며, 아트만이다. 그리고 오, 스베타게뚜여,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비록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는 무형상이다. 무상의 한 가운데서 그는 영원히 머무른다. 무소부재하고 지극히 높은 것이 아트만이다. 자신의 본성을 아는 현자는 모든 슬픔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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