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천적 정당화를 감각 경험과 무관성에 의거해 정의할 때 잘못된 점이 무엇인가?
- 칸트는 선천적 지식을 경험과 무관성에 의거해서 정의했다. 선천적 지식개념은 선천적 정당화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이유는 지식 실례를 선천적 지식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 지식의 정당화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선천적 지식은 정당화가 선천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식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어떤 믿음의 정당화는 경험과 무관할 경우에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그 믿음이 정당화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첫째는 경험이라는 개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와 둘째는 경험과 무관함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이다. 경험이라는 것을 감각 경험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감각 경험에 의존하여 정당화되지 않으면서 선천적으로 정당화되는 것도 아닌 믿음이 있다는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 나는 저녁식사로 스테이크를 먹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와 같은 믿음은 믿음의 정당화가 기억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정당화되는 믿음이 되지 않는다. 칸트의 정의를 볼 때 이것은 경험개념에 기억 경험과 내성 경험까지도 포함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2. 선천적 정당화를 필연적으로 옳은 명제를 믿을 때 우리가 갖는 종류의 정당화로 정의하는 일과 관련하여 반대할만한 점은 무엇인가?
- 선천적 정당화를 발생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한 가지 답은 필연성 개념에 호소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선천적 지식의 예로 간주되어 온 명제들의 공통점은 모두 필연적 즉 옳을 수밖에 없는 명제라는 것이고 선천적 정당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명제들이 필연적 명제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정의는 두 가지 이유로 실패한다. 첫째, 믿는 방식에 대해 어떤 구속요건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믿는 방식에 대해서 너무 관대하다. 둘째, 필연적 진리를 믿을 때마다 그 명제에 대한 정당화는 선천적이라는 사실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믿는 일이 후천적으로 정당화될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3. 분석성에 대한 칸트의 정의의 결점은 무엇인가?
-술어가 개념적으로 그 주어에 포함되어 있는 명제는 분석명제이고 술어가 주어의 개념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명제는 종합명제다. 분석성에 대한 칸트 정의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 번째 문제점은 모든 선천적 명제가 주어-술어 형식의 명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비가오고 있거나 또는 오고 있지 않다"는 것을 경험주의자는 분석명제라고 주장하지만 주어-술어 형식을 띠지 않기 때문에 종합명제라는 사실을 함의한다. 그래서 경험주의자가 볼 때 모든 선천적 명제가 분석명제라는 결과를 산출해내지 못한다. 두 번째 문제는 주어-술어 형식을 띠는 명제도 모든 경우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붉은 것은 무엇이든 채색되어 있다"는 명제에서 채색되어 있다는 개념이 붉음이라는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가 하는 물음을 묻는 것은 채색되어 있음이라는 개념을 이성주의자는 붉음 개념이 단순개념이므로 그런 분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선천적 지식이 분석명제에 대한 지식이라는 결과를 성취하지 못하고 선천성 영역의 축소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4. 분석성에대한 프레게 식 정의의 결점은 무엇인가?
-프레게 식 정의는 p는 분석적 명제이며, 논리학의 진리이거나 또는 동의어에 동의어를 대입함으로써 논리학의 진리로 환원될 수 있는 명제로써, 논리적 진리 개념은 모든 대입 실례가 옳도록 되어있는 논리적 형식이다. 예를 들어 '모든 총각은 미혼이다'라는 명제에서 총각이 '미혼의 성인 남자'로 정의 된다면 '모든 미혼의 성인 남자는 미혼이다.' 라는 명제가 나오는 것이다. 이로써 경험주의자는 모든 선천적 명제가 분석명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성주의자는 두 가지 이유로 거부한다. 첫째는 모든 선천적 진리를 분석명제로 만들려는 경험주의자의 목표가 충족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선천성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다. 즉 논리적 진리는 논리적 진리이거나 논리적 진리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알 수 있는 명제라는 결론을 얻지만 이 진술은 무엇을 조명해주는 통찰이 없다. 그래서 경험주의자는 논리적 진리로 환원될 수 있는 선천적 격위를 설명하지만 논리적 진리 자체의 선천적 격위를 설명하지 못한다.
5.토대론을 정의하는 두 가지 기본 신조는 무엇인가?
- 첫 번째는 믿음체계의 상부구조를 이루는 비기초 믿음들과 대비되는 것으로 믿음체계의 토대를 이루는 기초 믿음들이 있다. 두 번째는 상부구조에 속하는 각각의 믿음은 그 정당성을 궁극적으로 토대를 이루는 하나 또는 몇 개의 믿음에 의존한다.
6. 토대론자, 정합론자, 회의주의자가 무한 후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 후퇴논증의 요점은 어떤 명제를 부정할 경우 무한후퇴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그 명제를 지지하거나, 또는 어떤 명제를 주장할 경우 무한 후퇴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그 명제를 공격하는 것이다. 토대론과 정합론자는 정당화되는 신념이 있다고 생각하고 기초 신념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회의론자는 기초신념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당화되는 신념이 없다고 생각한다.
7. 고전적 토대론 현대토대론 최소 토대론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고전적 토대론에 따르면 믿음들이 진리성 보증을 받기 위해서는 기초 믿음은 오류불가능해야 하고 비기초믿음은 기초믿음으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되어야 한다.
현대 토대론은 기초믿음이 인식적 특권을 지녀야 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고전적 토대론과 비슷하지만 기초믿음에서 비기초 믿음으로의 비연역적 정당성 전달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래서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에 증거 틈을 연역적으로 메울 수 없다는 반론은 피할 수 있는 반면, 현상 믿음들이 확실성, 의심불가능성 또는 심지어 오류불가능성과 같은 인식적 특권을 지닐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최소 토대론은 전형적인 토대론을 수정한다. 기초믿음이 인식적 특권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그래서 물리적 대상에 관한 믿음이 기초믿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상부구조의 믿음과 토대 믿음의 차이는 믿음 내용의 기능이 아니라, 오로지 그 믿음이 정당성을 제공받는 방식의 기능일 뿐이라고 한다.
8. 반주어는 순환적 정당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정합론자는 인식적 순환성―믿음들이 서로 정당화 한다는 관념―이 그리 나쁜 관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반주어는 “토대론과 실제-무한-후퇴 입장(실제 무한 후퇴가 정당성을 산출할 수 있다는 입장)을 모두 거부하면 정합론자는 경험적 정당화의 후퇴가 순환적으로 진행된다고 주장해야 한다.”고 표현했다.
9. 레러에 따르면 정합성과 경쟁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 레러는 “경쟁 주장을 물리침”을 정합성의 본질적 요소로 간주한다. 어떤 명제 p가 당신의 승인체계와 정합하려면 p는 당신이 승인하는 모든 경쟁 명제를 물리쳐야 한다.
10. 반주어에 따를 때 비믿음 수준 정당화의 옹호론자는 어떤 딜레마에 직면하는가?
- 비믿음 수준의 경험은 자각 상태이든지 아니든지 둘 중 하나다. 만일 비믿음 수준의 경험이 자각 상태라면, 그것은 자신이 정당화될 경우에만 정당화할 수 있다. 만일 자각 상태가 아니라면, 그 상태는 그자체로 정당화될 수 없으며, 그래서 어떤 믿음도 정당화할 수 없다.
11. 신빙론의 세 가지 표준적 문제는 무엇인가?
- 신빙성의 난점 세 가지에서
첫 번째 문제인 사악한 악마의 문제는 신빙성이 정당성의 필요조건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례를 나타낸 것으로 신빙성이 정당성에 필요한 성분이 아니라는 주장이며
두 번째 문제는 투시력의 문제로써 신빙성이 있는 신념 산출이 정당성의 충분조건인가 하는 의문으로 예컨대 투시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의 신념은 신빙성 있는 충분조건이라고 주장한다. 과정신빙론자는 지지하는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고려함과 같은 과정에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일반성 문제는 특정 사례에서 어떤 신념을 산출하는 특수한 인지과정표지과 그 것을 예증하는 다양한 인지과정 유형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인지과정 유형의 특수한 표지들 자체는 신빙성이 있음이나 없음 이라는 속성을 갖지 않으며 오히려 인지과정 유형이 신빙성 여부를 결정한다.
12. 어떤 의미로 콰인은 인식론을 자연화 할 것을 제안하는가? 그리고 그런 자연화를 옹호하는 콰인의 논증은 무엇인가?
- 자연주의 인식론에서 콰인은 부정적이다 전통적 인식론을 버리고 새로운 인식론으로 대체하려 하였고 그의 논문에서 인식론을 자연과학의 한 부분으로 만듦으로써 인식론을 전혀 다른 새로운 학문 분과로 전환시키는 것을 옹호한다.
콰인은 전통적 인식론 견해의 주요 관심사는 정당화이다. 이 관심사는 확실성 형태를 띠므로 폐기되어야 하고 대신 우리가 어떻게 감각 자극으로부터 우리의 세상에 이르는지 연구해야한다. 이 연구의 목적은 정당화가 아니라 과학적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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