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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공부하기/인문학

[철학] 형이상학-악의 문제

by som-mong 2022.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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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문제는 유명한 철학적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왜 신은 악을 허용하느냐는 물음이 가장 흔하지만, 이는 악의 문제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유대 기독교적 전통에서 신은 전선 하다고 간주하며, 바로 이 때문에 신이 악을 허용한다면 심각한 지적, 실제적 문제가 된다.

13세기의 철학자 아퀴나스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드러내어 표현하였다.

악의 문제

심은 실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만일 두 가지 반대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무한하다면 나머지 하나는 아예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라는 낱말은 그가 무한한 선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만일 신이 실존한다면 어떠한 악도 발견될 수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악이 있다. 그러므로 신은 실존하지 않는다.

아퀴나스의 표현은 문제를 명확하게 드러내어 진술했지만, 그의 글은 문제를 근대적 방식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신은 무한한 선의 구현 그 자체이며, 단순히 선이라는 하나의 속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신의 선이 무한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으므로 이는 신 외에 다른 어떤 것에서 악이 구현된다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악이 존재하면서도 신은 무한하게 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악과 신이 양립할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신이 무한히 선하다는 사실이 왜 다소 것들이 다소 악할 수 있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야 하는가?

이 문제를 딜레마 논증으로 정식하게 되면 보다 근대적이며 명확한 표현이 된다.

(신은) 악을 기꺼이 막고자 하는데, 그럴 능력이 없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는 무력하다. 그가 할 수 있는데, 막고자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를 갖고 있다. 그는 막을 수도 있고 막으려고도 하는가? 그렇다면 존재하고 있는 악은 어찌 된 일인가?

이 딜레마는 전통적인 크리스트교 신학에서 신이 선하면서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악의를 갖지도 않았고 무력하지도 않다. 이 문제를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신은 전선 하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실존한다.’는 세 명제는 일관성이 없는 진술 집합이라는 주장이다.

신은 전선 하다는 명제에서 신을 최소한도로 악의 반대, 비악이라고 정의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신이 선을 원한다는 말은 신이 악의 반대, 즉 악하지 않은 것을 원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악을 제거한다.

신은 전능하다는 둘째 명제에서 우리는 전능한 존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그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만일 신이 전능하다면 그가 못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앞에서 말한 신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악을 제거한다에서 신이 할 수 있는 한이라는 어구를 지울 수 있다. 전능한 존재의 경우 한계를 말하는 수식구를 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은 모든 악을 제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신이 존재한다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세 번째 명제 악은 실존한다와 모순된다.

그러나 우리가 통산 그러하듯이 악을 물리적 고통, 정신적 고뇌. 도덕적 나쁨으로 정의한다면 악은 실존한다는 경험적으로 옳다. 따라서 악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르다. 그런데 악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의 선과 노력에 관한 두 명제의 결론이라고 생각되었다.

악의 문제가 이신론자에게 어려움을 안겨주는 이유는 전통적으로 전선함과 전능함을 신의 성의 특성의 목록에 함께 포함한 데 있다. 둘 가운데 하나를 포기하면 전통적인 방식으로 특성 짓던 신의 실존을 부정하게 된다.

악의 문제의 알맹이에는 신의 실존과 악의 실존이 어긋난다는 논증이 자리 잡고 있다. 원래의 세 명제는 분석을 가할 필요가 있었고 분석 결과 원래의 세 명제로 이루어진 진술 집합이 모순관계의 명제를 포함하고 있다고 밝혀졌다. 이런 대목에서 악의 문제는 그 자체로 풀기 난제며 원래의 세 개의 초기 명제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무엇이 악의 문제를 해소해주는가? 우선 주목할 만한 답은 무신론이다. 이는 가장 단순한 해결책으로서, 신의 존재를 전적으로 부정해 버린다. 신의 실존을 부정해 버리는 무신론자에게는 문제 자체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신의 실존과 악의 실존 사이에 성립하는 갈등이며, 그래서 만일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면, 그의 실존과 다른 어떤 것의 실존이 상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맥키는 악의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 하나는 논리적으로 적절한 해결책이고, 다른 하나는 논리적으로 부적절한 해결책이다. 논리적으로 적절한 해결책에는 세 가지 주된 유형이 있는데, 이들은 세 개의 초기 명제를 각각 부정한다.

전선을 부정

전능을 부정

악의 실존을 부정

흥미롭게도 이처럼 논리적으로 적절한 해결책이 신학적 관점에서는 전적으로 부적합하며,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초점을 상실한 이야기라고 판정된다. 이들은 악의 문제를 해결할지는 모르지만, 이문제가 자라난 뿌리, 즉 이 문제를 중요하게 만들어 주는 개념을 부정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그 개념이란 다름 아닌 전통적인 신의 관념, 즉 위대하고 선한 신의 관념이다.

예를 들어 첫 번째 유형은 심리학자 융이 시도한 답변이다. 그는 정통적인 크리스트교의 삼위개념이 악의 원리를 포함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위개념을 주장한다. 그 이유는 (1) 사위개념이 삼위일체 신앙을 보다 전체적인 것으로 만들며, (2) 악의 문제가 생기지 않으며, (3) 네 가지 원리나 그 이상의 원리를 포함하는 종교적 상징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이다. 신은 빛의 실체이지만, 어둠 또한 존재한다. 그래서 융은 어둠을 빛에 포함한다. 융은 이렇게 해서 발생하는 난제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우리는 두 번째 유형의 해결책을 내놓았던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도에 대해서도 이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마니교는 후기 크리스트교의 영지주의 신앙으로, 이에 따르면 구원의 빛이 지혜를 통해 발견되며, 빛의 원리와 어둠의 원리가 동등하게 강력한 원리이다. 융과 같이 마니교는 사위의 신개념을 갖고 있었다.

만일 신이 완벽하게 선하지 않거나, 전능하지 않다거나, 또는 전선 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들의 물음이 철학적 물음이다. 위대한 빛이라는 심상과 빛의 활동이라는 심상은 별 도움이 안 된다. 심상은 오직 심상 정도로 남아 있을 뿐이며, 명확한 개념이나 정의를 밝혀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유형의 해결책은 흔히 이용되는 방법이며, 여러 형태로 정통 신학의 요리로 편입되었다. 이것은 선의 결핍에 의존한 논증이라고 할 만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가장 유명한 지지자일 것이다.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이 선의 결여 이외에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에 의하면, 상처나 병과 같은 악이란,

실체가 아니라 결함이다. 이를 철학의 전문용어로 말한다면 실체와 대조되는 우연적 존재, 즉 우유이다. 존재하는 것, 즉 실체는 좋은 것인데, 그것은 존재가 신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이 아닌 것, 즉 악은 존재를 결여하고 있다. 악이란 세계라는 실체를 관대무가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견해가 직면하는 어려움은 다음과 같다. 만일 악은 무이며, 신은 무를 창조했기 때문에 신에게 악을 창조해낸 책임이 없다고 한다면, 그는 다른 책임, 즉 관대무가 실체를 공격하도록 허용한 책임을 지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계는 거대한 해면이며 신은 그 둘레에 있는 무한한 바다로 보았다. 또한 해면 속에 있는 물처럼 신이 세계에 스며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악은 해면 안에 존재할 수 없는데, 물이 무한하고해면 속의 가용 공간 전체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은 해면의 바깥에 있어야만 하며, 해면은 세계, 즉 존재에 해당하기 때문에 악은 존재를 가질 수 없다.

맥키는 논리적으로 흠이 있는, 즉 논리적 오류를 범한 네 개의 주된 문제 해결책을 효과적으로 나열했다. 그가 이들을 오류라고 진단하는 이유는 원래의 난제를 이루는 성분 명제들 가운데 하나 또는 그 이상이 포기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서, 아무런 제한도 가해지지 않은 채로 다른 맥락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악은 선이 성립되기 위한 상대역으로서 필연적이다.

하지만 이는 신의 선함을 부정한다. 만일 선에 악이 필요하다면, 선 또는 신은 악과 반대되지 않는다.

(2) 악은 선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필수적이다.

이는 신의 전능함을 부정한다. 다소 냉소적인 속담이 있다. ‘당신은 달걀을 깨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신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달걀을 깨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 있다.

(3) 세계는 악과 악의 결과로, 그것들이 없을 때 보다 더 좋아진다.

하지만 만일 신이 전능하다는 게 옳다면 그는 악 없이 다른 방법을 통해 원하는 결과를 성취할 수 있다. 나아가 다음과 간은 논증이 제시된다고 해보자. 오직 선을 포함한 세게는 약간의 악을 포함한 세계만큼 좋지는 않다. 왜냐하면 악은 보다 가치 있거나 고차원의 선을 산출하는 기회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 논증은 두 가지 사항을 간과했다. 먼저 악의 실존에서 비롯되는 도덕적 선이 진정으로 악 없는 세계의 선보다 좋은지는 명백하지 않다. 둘째로 이 논증은 2차적 악을 포함하지 않았다. 전쟁은 확실히 영웅주의라든지 보다 고차원적인 도덕적 선을 가져올 수 있지만, 또한 더불어서 비겁, 배반, 절망을 비롯한 다른 이차적 악을 가져올 수 있다.

(4) 악은 자유의지의 선행조건으로서 필연적이다.

더 값진 대가를 치를 만한 선행 조건이 존재하지 않을 만큼 가장 좋은 것이 바로 자유의지이다. 최대한의 가능한 선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필요하다. 자유의지는 선택의 여지가 필요하다. 선택은 선과 악을 필요로 한다.

맥키는 마지막 전제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기 위해서 왜 선과 더불어 악도 꼭 필요할 수밖에 없는가?

만일 선택 상황에 부닥쳐서 어느 때는 선을 선호하고, 어느 때는 악을 선호하도록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왜 신은 인간이 항상 선을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만들 수 없었는가? 만일 인간이 일부의 제한된 상황에서 선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상황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면, 인간이 모든 상황에서 선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상황 역시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수 없다.

이 인용문에서 맥키의 마지막 논증은 약해 보인다. 만일 삼각형의 한 각만이 직각이라는 주장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면, 삼각형의 모든 각이 직각이라는 주장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 따라 나오는가? 또한 맥키의 논증에 따르면, 만일 인간이 이런저런 경우에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면, 온종일 모든 경우에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맥키의 논증은 전체적으로는 건전한 것 같다. 순전히 우연에 의해 항상 21이 나오는 룰렛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조작되어 있다고 의심하는 게 합당하다. 그렇지만 조작되지 않다고 가정해보자. 같은 번호가 계속 나오는 일은 분명 흔하지 않지만, 그 룰렛은 기억장치를 가진 게 아니고, 또한 임의 번호가 계속 나오는 일 역기 그와 다른 번호가 계속 나오는 것만큼이나 개연성이 없다. 오직 한 차례만 21이 나왔다고 하는 일게 모순이 없으며, 또한 모든 경우에 21이 나왔다고 해도 모순이 없다.

논리적으로 적절한 해결책은 신학적으로 부적절한 해결책이며, 따라서 이에 따를 경우 크리스트교에 대한 이단의 설로 흐르게 된다. 신학적으로 적절한 해결책은 맥키가 지적했듯이 논리적으로는 부적절하다.

악의 문제는 최초 명제를 신이 악을 제거한다는 명제로 해석함으로써 생겨났다. 남은 문제는 신학적 문제이고, 그래서 우리가 신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답이 정해진다. 신은 악의 반대라는 명제와 신은 악을 제거하지 않는다는 명제 사이의 간격이 존재함을 설명하기 위해서 제기될 만한 물음은 크리스트교의 입장에서만 답해야 하는 물음은 아니다. 그래도 크리스트교가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답해야 할 신학적 문제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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