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진리’라는 말을 많이 쓴다. 진리라고 직접 말하지 않더라도 ‘네 말이 맞다’ 또는 ‘거짓말이 아니라 참말이다’라는 표현을 쓴다. ‘참이다’라는 단어는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의 의미들로 사용된다. 진리이론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의미들을 지니는 진리에 대해서 다루지 않으며 문장의 속성 내지 특성으로서의 지리에 관심을 국한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참인 내용을 담고 있는 문장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를 물음으로 이해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리’라는 단어의 의미 내지 정의를 묻는 물음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 특히 학문적 활동에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추구하고 있는 진리란 어떤 것인가?
우선 믿음이 가는 것, 확신이 가는 것을 진리라고 하는 생각이 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는 말이 있다. 원시 기독교 시대에, 신생기독교가 다른 여러 종교들 속에서 제자리를 잡아나가려고 노력하던 시절, 경건한 신앙생활보다는 교리의 철학적 해석에만 골몰하는 일파를 보다 못해 외친 소리이다. 더 정확히는, “(…) 하나님의 아들은 죽었다. 이것은 불합리한 일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는 죽은 후에 부활하였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확실하다”라고 이어진다.
‘합리적’이란 이성에 합당하고 논리에 합당한 것, 즉 이치에 맞고 논리적인 것을 말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일상적으로는 이치에 맞는 것이라야 믿는다. 사실 합리적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한다. 이것은 종교란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귀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요, 이때 믿음이란 인간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설명을 초월한 세계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종교적인 믿음 말고 우리의 일상적인 믿음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 ‘해는 아침에 동쪽에서 솟아올라 저녁이면 서쪽으로 진다’라고 믿어왔다. 이것은 날마다 거듭되는 나의 경험을 토대로 한 믿음이다. 그러나 학교에 다니면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은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일 뿐, 사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이라고 배우게 된다. 또 어린 시절에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굴뚝을 타고 내려와 착한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신다’라는 얘기를 굳게 믿는다. 이것은 부모님이나 친구들의 말, 즉 남의 말을 토대로 한 믿음이다. 세월이 흐르면 아이들은 산타클로스가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반대로 도무지 믿기지 않는 견해이지만 엄연히 진리인 것도 있다.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을 때 당시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와 같이 믿음이란 주관적인 확신을 말하기 때문에 사람이나 경우에 따라서 다르므로 내가 믿는가도 해서 반드시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믿음과 진리는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의 지식은 어떤 객관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대응설, 정합설, 실용설 세 가지 학설이 주장된다.
진리개념에 대한 전통적인 이론들로는 대응설 외에 정합설과 실용설을 들 수 있다. 그 중 내부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의 직관에 가장 부합되는 것으로서 다른 진리론들에 비해 비교적 많은 지지를 받아 온 것으로서 대응설을 들 수 있다.
“내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네가 직접 가보렴.”
이 말은 이러쿵저러쿵 입씨름을 하느니 현장에 가서 직접 눈으로 보면 내 말이 옳은지 그른지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접 가보아서 사실과 들어맞으면 그 말이 옳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른 것이다. 이처럼 생각 또는 판단이 사실이나 대상에 들어맞을 때 진리라고 한다. ‘들어맞는다’는 말 대신 ‘일치한다’ 또는 ‘대응한다’는 말도 쓴다. 그런데 판단은 관념적, 추상적 존재이고, 사실은 감각적 구체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두 삼각형이 합동이라고 할 때와 같은 경우라면 모르되 이렇게 존재 방식을 달리하는 경우에는 ‘들어맞는다’든가 ‘일치한다’는 말보다 ‘대응한다’는 말이 좀 더 적합하다. 이렇듯 ‘판단이 사실에 일치, 대응할 때 진리’라고 하는 견해를 대응설이라고 한다. 즉, 판단(진술 또는 명제)과 실재하는 대상의 일치 여부에 의하여 진위를 판정한다는 학설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은 늘 거울과 같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를 모사하는 것일까? 우리는 너무도 무비판적으로 감각적 모사설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조금만 반성해보아도 우리의 감각이 언제나 거울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대상을 인식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하에서라는 단서가 붙겠지만, 감각기관의 생리적 상태, 조명, 대상의 위치 등 모든 것이 아무리 정상적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감각기관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은 자외선이나 적외선을 보지 못한다. 냄새를 맡거나 소리를 듣는 능력도 개에 비해 뒤떨어진다. 현미경이나 망원경, 보청기와 같은 보조기구를 사용한다고 해도 우리의 감각 파악 기능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인간의 감각은 바깥에 있는 사물을 사실 그대로 모사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모사설 또는 대응설은 성립할 수 없다.
그렇다면 모사설의 성립 여부는 인간의 감각기관의 능력 여하에 달려 있고, 감각기관의 능력의 한계 내에서는 모사설이 성립한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모사설은 순수 이론적으로도 성립할 수 없다. 모사설이 올바른 주장이라면 과념과 대상의 일치 내지 대응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관념과 대상의 일치 여부를 알려면 이 둘이 서로 비교되어야 할 텐데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두 관념을 비교할 수 있을 뿐, 관념과 대상 자체를 비교할 수는 없다. 이는 감각적 모사설이 원칙상 성립하지 못함을 밝혀준다.
즉, 주관을 완전히 떠나서 우리들의 지각하는 그대로의 실재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유치한 독단이다. 만일 이러한 외계가 독립으로 실재한다고 가정해도 우리들은 그 외계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모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감관이 불완전한 장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상인이라도 감관에 의해 경험할 수 있는 범위는 현저히 제한되어 있다. 망원경이나 현미경이나 확성기 등으로 보충해도 그 한계는 면하기 어렵다. 이리하여 우리들의 표상은 결코 외계와 동일할 수는 없다.
만일 표상이 외계를 그대로 묘사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들의 표상은 주관의 상태에 의하여 제한되는 일이 심히 많다. 그러므로 어떤 표상이 진실인가를 결정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감각 특수세력설의 주장과 같이 다른 자극도 동일의 감관에는 동일의 감각을 생기게 하는 일도 있는 것이다. 또 예를 들면 외계의 사물로서는 동일성질의 것이라 해도 그 외관을 달리하는 것도 있고, 외관은 동일하더라도 그 성질이 다른 것도 있다. 수증기․물․얼음 등은 전자의 예이고, 수정․유리등은 후자의 예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표상이 확실한 것이라 해도 그것을 가지고 곧 표상의 진을 결정할 수는 없다. 가령 그것을 결정했다 해도, 그 표상을 직접 실재와 비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비교하기 위해 생각해 낸 실제 그 자체는 이미 표상이지 실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양자를 비교할 수 없다고 하면 그것이 실제와 합치하는지 아닌지는 결정하기 어렵고, 따라서 진리의 확정이 불가능하다.
만일 이상의 곤란이 모두 제거되었다 해도 우리들의 지식은 경험할 수 있는 범위 내에만 있는 것에 한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완전히 이념적인 수의 세계의 지식과 같은 것도 있다. 이들은 그것에 대응할 실재가 없다. 그렇다고 이것을 진리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이리하여 모사설은 도저히 철학설로써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경험, 새로운 지식이 옳은지 그른지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까? 대상, 실재에 비추어 볼 수 없으므로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의 체계 중 옳다고 판별된 체계에 비추어 볼 수 밖에 없다. 어떤 대상을 지각한다는 것은 카메라로 찍듯이 우리의 감각에 나타나는 것을 그대로 기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가령 어떤 대상을 책상이 아니라 걸상이라고 안다는 것은 식별을 가능하게 하는 과거의 경험적 지식이 토대가 되어야 가능하다. 눈앞의 사물에 비추어서 걸상이면 걸상이라고 이해하며 해석한다. 과거 경험의 그물이란 우리가 지금까지 생활해오면서 통용되어 온 지식의 체계를 말한다. 그리하여 어떤 새로운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그 무엇이 기존의 지식체계로 설명이 된다. 이 체계와 부합한다는 뜻이다. 즉 새로운 지식이 기존의 지식체계에 모순됨이 없이 들어맞는지의 여부에 의해 지식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주장을 정합설이라 한다. 정합론이 언급하고 있는 ‘정합’이란 어떤 종류의 관계일까? ‘정합’을 단지 ‘명제들 간의 일관성’ 즉 ‘모순이 없음’으로 해석해야 할까? 이런 해석은 서로 모순적이지 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데 분과하게 된다. 그러나 정합론에서 주장하는 ‘정합적’이라는 말은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정합론에서의 ‘정합적’이라는 단어를 한 이론체계 안에서의 어떠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다시 말해 정합설은 한 명제의 진위는 그 명제가 속하는 이론체계에 부합되는가의 여부에 의하여 진위가 결정된다는 학설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명제와 그 상위체계의 적합성이 검증되기 위해서는 무한으로까지 소급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최종적인 이론체계의 진위 문제는 언제나 해결되지 않고 남게 된다는 약점이 있다.
정합설은 감각적 검증이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한 형식과학에만 적용되고 사실과학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제약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여러 난점이 있다.
먼저 정합설이 사실적 진리에 만족할 만한 입증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난점이다. 순수 수학이나 형식적(formal)진리에 관한 한에서는 정합설이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그것이 이미 알려진 모든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데 그치지 않고, 검증을 거쳐 새 사실을 발견하여 그것이 참임을 보증해 주어야 한다. 우선 판단이 기존의 판단체계와 정합할 때 ‘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기존 판단체계의 진리성은 어떻게 확증할 수 있을까? 그것은 또 그보다 앞선 기존의 판단체계와 정합해야 한다. 이 과정은 무한히 소급되어 마침내는 더 이상 소급할 수 없는 제일의 판단에 이른다. 그러면 제일의 판단의 진리성은 기존 판단체계와 정합에서 구해질 수 없고, 이와는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서 진리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즉 정합설은 그 안에 정합설이 아닌 다른 원리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 된다.
또 정합이란 두 판단이 서로 모순되지 않음을 말하는데, 그러면 정합설은 논리학의 기본 원칙인 모순율을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순율 자체의 진리성은 무엇에 의해서 확보될 수 있을까? 물론 복잡한 과학 이론에서 직접적인 관찰이나 검증이 불가능한 때에는 이미 질리라고 인정되고 있는 기존 이론체계와의 정합 여부가 새로운 이론의 진위를 가리는 중요한 기준이 됨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순율 자체의 진위가 문제일 때 이것도 정합여부로 가름할 것인가? 역시 정합설은 다른 어떤 원리의 토대위에 있다고 하겠다.
미국의 실용주의는 대응설이나 정합설과는 아주 다른 관점에서 진리를 고찰한다. 실용주의 에서는 지식을 그 자체로서 다루지 않고 언제나 생활상의 수단으로 본다. 실용설에서는 지식이 실제 생활에 있어서 성공적이거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낳거나 실제로 유용할 때 ‘참’이라고 한다. 원래 실용주의는 물리학이나 생물학과 같은 실험과학의 방법을 논리적 사고의 영역에까지 확대 적용한 것이다. 실험과학의 명제는 실험이라는 행위와의 관계에서 명제의 진위를 논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아무리 완벽하다고 해도 실험의 결과에 의해서 실증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실용주의에서 관념과 생각 그 자체는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행동을 통해 실제 생활에 적용되어 유용하면 비로소 진리가 되고, 유용하지 못하면 거짓이 된다. 그러므로 관념의 진위가 실제 행동과의 관련에서 가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진리를 오로지 이론적인 영역 내에서만 논의하고 있는 대응설, 정합설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이다. 즉 실용주의는 진리론을 인간의 행동, 실천과 관련지어 논의 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진리론을 현실 생활계에 밀착시킨다는 바람직한 결과를 낳았다. 동시에 실용주의 진리관은 각기 일면적이기만 한 대응설과 정합설을 종합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실용설은 지식․사상․관념․명제 등의 참과 거짓 여부는 그것들이 가져올 실제적 결과의 유용성 여부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학설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지식을 경험의 범위에 한정했다는 점과 진리의 상대론에 빠져있다는 점에서, 진리는 경험할 수 있는 범위에 한정되고, 일정한 표준이 없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실용주의는 원래 주지주의에 반대해서 일어난 것으로, 그 때문에 정의를 강조하고, 이성주의․절대주의에 대하여 경험주의․상대주의를 주장한다. 그러나 진리의 본질, 그것을 설명하는 학문으로서는 다소 난점이 있다.
먼저 지식을 경험의 범위에 한정했다고 하는 점에서 경험주의가 당연히 받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또한 진리의 상대론에 빠지는 것이 절대적으로 잘못이다. 즉 사람마다 각자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가지고 진리를 이룬다고 할 때, 동일 대상에 대하여 완전히 모순되는 명제도 가능하게 되어 결국 진리에 대한 일정한 표준이 없고, 따라서 일반적 진리는 있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침내 궤변론자와 같은 회의론에 빠지고 말 것이다. 회의론은 바로 학문 그 자체의 자기 부정이고, 인식론 그 자체의 자살이다.
학문은 생활을 위해 존재하고, 진리는 실용을 위해 있고, 학문을 위한 학문․진리를 위한 진리는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주장에는 일면의 진리는 있으나, 학문의 본질은 오히려 후자의 방면에 있어야 할 것이다. 진리가 효용성에 의존해야 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효용성이 진리에 의속(依屬)해야 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진리이기 때문에 이로운 것이고 이롭기 때문에 진리인 것은 아니다.
실용설이 현실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되어야 하겠지만, ‘만족스럽다’든가 ‘실제로 유용하다’든가 하는 개념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어서 진위를 가리는 논리적 기준으로서는 불명확하다. 또 진리가 행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관념의 진위는 행동을 통한 실제적인 결과를 기다려야 비로소 판정된다는 뜻이다. 즉 구체적으로 실행해 보아야 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본다’는 과정을 밟고서 진위를 판가름한다는 것은 힘에 여유가 있다든가 또는 성공의 가능성이 아주 높다든가 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언제 어느 때나 또 무엇이나 다 해볼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해본다’라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우리 행동은 시험 삼아 한번 해보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환신의 기반 위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대응설, 정합설, 실용설의 세 가지 진리론은 각기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문제되는 대상의 성격에 따라 그때그때 적합한 진리론을 골라야 할 것이다.
과제를 위해 많은 자료를 검색해 보았고, 보다 확실한 공부를 위해 책도 몇 권 뒤져 보면서 진리이론에 대해 전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은 나에게 아직 어렵고 더구나 현실에 적용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해 보인다. 그래서 나는 공부했던 진리이론과는 별개로 내가 생각하는 진리란 무엇인가 깊이 고민해 보았다.
‘진리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너무나 크고 막연하게 다가왔다. 생각해보면 생각해볼수록 진리에 대한 나의 질문들은 선명해지기보다는 흐릿해지고, 바라는 답은 나오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연속이 계속될 뿐이었다. 그렇게 혼자 끙끙대고 있을 때, 문득 이 질문에 정답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에 대해 아직 요만큼도 모르는 작은 내가 정답을 찾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 아니겠는가. 내가 찾아서 나올 정답이었으면 벌써 “진리는 이러이러한 것입니다.” 하고 누군가가 정의 내렸을 것이다.
이러한 고민 끝에서 나는 진리를 찾기 위한 인간들의 쉼 없는 탐구, 그 자체가 진리일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인간이 사고하고 추구하는 행동이 비록 각 개인마다 논리나 관점이 일정하지 않는 단순한 생각의 어지러운 파편이었을 지라도 이런 행위를 통해 진리를 탐구해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어질 그러한 인간의 행위, 그 자체를 진리라고 말하고 싶다. 인류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진리로 가는 길, 즉 철학에 이르는 길은 끝없이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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