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한 믿음들이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어떤 구조를 갖게 되는가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토대론과 정합론은 논쟁이 되어왔다.
비유에 따르면 토대론은 인식 정당성의 구조에 관하여 피라미드식 구조를 옹호하는 입장이며, 정합론은 뗏목식 구조를 옹호하는 입장이다. 피라미드에서는 각 돌이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방향으로 일방향적으로 그리고 계층적으로 의존하면서 자시의 위치를 유지한다. 반면에 뗏목에서는 각 통나무가 서로 상호 간 유기체적으로 연결됨으로써 하나의 배를 이루게 된다.
1. 토대론 (기반주의)
(1) 정당한 믿음들은 그 정당성을 다른 믿음들에 의존하는 믿음들과 다른 믿음들에 의존하지 않고서 정당하게 되는 믿음들의 두 부류로 구분된다.
- 이는 과 으로 표현될 수 있다.
(2) 기초적 믿음들이 인식 정당성의 원천이며, 다른 믿음들은 정당성을 궁극적으로 기초적 믿음에 의존한다.
(3) 인식 정당성은 한 방향으로만 이루어진다. (일 방향성)
- 사실 일 방향성이 아니다. 다르게 말하면 상층의 믿음은 그 정당성을 하층의 믿음들에 필연적으로 의존하지만, 하층의 믿음들은 상층의 믿음들에 정당성을 필연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토대론에서 주장하는 논리로서 20세기 이전의 철학자로 데카르트를 꼽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울 것이다. 확실성에 토대를 둔 기초적 믿음을 근간으로 하여 우리의 전반적인 지식 체계를 견고하게 재구성해 냄으로써 그 어떠한 회의주의에 대해서도 방어할 수 있다는 그의 토대론적 전략은 그 실현 여부는 둘째치더라도 우리의 매력을 끌 만하다. 특히, 인식 정당화의 소급 문제에 대해서도 더 이상 불가해한 개념을 설정할 필요 없이 즉각적으로 그 답변을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더욱 그럴 것이다. 그래서 현대 인식론자들의 관심도 여전히 데카르트의 관심사와 연장선에 있을지 모르겠다. 최근보다 세련된 형태의 실질적 토대론을 구축하기 위한 시도와 이를 둘러싼 논란도 데카르트적 토대론이라는 이상적 모델이 그 배경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대의 다양한 인식론적 이론들도 이를 염두에 두고 생겨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최근 많은 인식론자 사이에서 토대론적 전략은 더 이상 지식의 본성을 반영해 낼 수 없으며, 따라서 이제는 폐기되어야 할 철학적 유물이라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그러한 드높은 목소리의 출처가 ‘기초적 믿음’에 대한 의혹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주장에는 현대 인식론에서 전통적 토대론의 전략 가운데 여전히 유효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이론의 구조, 즉 논리적 형식이지 그것이 담고 있는 실질적 내용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토대론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그 속에 담게 되는 내용물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실질적 토대론이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물론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느냐 하는 물음은 여전히 남겠지만, 토대론이 유지될 수 있는 가능성은 일단 열려 있는 셈이다. 현대 인식론에서 인식적 토대론의 유효성 시비가 여전히 하나의 쟁점으로 남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토대론적 전략이 아직 유효하다는 평가가 다른 지식관으로의 대안적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대 인식론에 관한 수많은 논의에는 그 배후에 토대론이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성립 가능성 여부를 중심으로 그 논쟁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고 토대론을 전망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토대론적 전략을 유지하기 위한 다각적인 모색에도 불구하고, 결국 회의론적 귀결을 피할 수 없다는 진단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비록 확실성에 근거하여 견고하게 짜인 데카르트식의 토대론적 구조가 지식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을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존립 근거라 할 수 있는 기초적 믿음의 '자생적 정당성'에 관한 부분이 해명될 수 없다면 토대론적 전략이 유지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그것은 토대론의 성립 가능성을 결정짓는 기초적 믿음의 '정당화 부여 속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토대론의 성립 가능성 여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의 성격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해는 기초적 믿음의 정당화 부여 속성에 관한 이해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1)토대론의 자생적 정당화 토대론은 기초적 믿음과 비기초적 믿음이라는 서로 다른 믿음의 존재를 인정하고 동시에 비기초적 믿음이 기초적 믿음으로부터 추론을 통해 정당화되는 구조를 갖는다. 따라서 토대론을 본질적으로 규정짓는 것은, “정당성의 원천인 기초적 믿음이 존재하고, 다른 어떠한 믿음도 기초적 믿음에 의존함으로써 그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두 가지 테제이다. 이는 정당성의 출처가 서로 다름을 의미한다. 전자의 출처가 자생적이라면, 후자의 출처는 의존적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토대론 성립의 가능 근거는 다름 아닌 기초적 믿음의 자생적 정당에 있다. 그런 점에서 현대의 다양한 인식 정당화를 둘러싼 이론들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도 기초적 믿음에 대한 자생적 정당화의 가능성 여부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의 부산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토대론을 본질적으로 규정짓게 되는 것이 그 정당성을 스스로 발생시키는 자생적 정당화에 있다고 했을 때, 과연 그러한 자생적 정당화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은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지식의 존립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기초적 믿음의 자생적 정당화는 반드시 확보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 가능성 타진에 사활을 걸 게 된다. 그런데 기초적 믿음의 자생적 정당화가 확보되는 방식에 있어 대부분의 토대론자들이 부딪치는 문제는 ‘자생적’이라는 의미가 다른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 방식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초적 믿음 내부에서 그 정당성을 스스로 발생시키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2) 귀납주의 경험에 주어진 것으로서의 믿음(내성적 믿음) 초대론에서는 논점 선취의 오류 즉, 귀납론, 즉, 그것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정당화되지 않은 귀납적 논증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영수는 어느 날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된 한 전시회에 가게 되었다. 나름대로 미술에 일가견이 있던 그는 전시된 그림을 유심히 감상하다가 한 그림에 눈이 가게 되었다. 영수는 그림에 어느 정도 식견이 있었기 때문에, 면밀한 검토 끝에 그 그림이 진품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진품이 아니라, 전문가라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정교하게 그려진 모조품이었다. 진품은 매우 중요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손상 내지 도난의 우려 때문에 바로 뒤에 숨겨 두었으며 대신 모조품을 전시했다. 그렇지만 영수는 그 앞에 늘여 있는 그림을 보고 진품이라고 믿는다.
이 경우 영수의 인식 체계 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진품의 그림을 보고 있는 경우와 동일하며, 따라서 정상적인 시각에 의한 믿음이 인식 정당화된다면, 영수의 믿음 역시 인식적으로 정당화된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영수는 문제의 그림이 진품이라는 자신의 믿음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자신 앞에 진품의 그림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예에서 영수의 믿음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단지 감각 경험으로서 다른 어떠한 믿음도 전제로 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경험에 주어진 내성에 따른 믿음을 만족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정당화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온다. "이것은 P이다"라는 믿음이 기초적 믿음일 수 있는 이유가 P로 보임이라는 경험에 의해 정당화되기 때문이라고 했을 때, p로 보임이 "내 앞에 P가 있다"는 믿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면 "내 앞에 P가 있다"는 믿음이 기초적이지 않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내 앞에 P가 있다"는 믿음의 정당화를 위해서는 P로 보이는 것 이외에 또 다른 측면이 요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경험에 주어진 것에 대한 내성적 믿음이 이와 같은 반례를 허용하게 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이유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경험에 주어진 것에 대한 내성적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인식 주관이 내성이라고 하는 인식능력이 믿을만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에 대한 요구가 깔려있다. 다시 말해서, 내성적 믿음에 어떠한 거짓 전제도 포함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 주체의 의식이 동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모든 믿음의 정당성은, 그 믿음이 참이라는 내성적 믿음이 감각 경험에 의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경험에 주어졌을 때, 왜 그 믿음을 참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인지자 자신이 소유하고 있어야 할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내성적 믿음이 기초적일 수 없다는 가장 강력한 비판으로 알려진 봉쥬르(R. Bonjour)의 반론 역시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의 주장에는 어떤 믿음이 되었건 그것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왜 참인지에 대한 별도의 믿음이 요구되며, 그 믿음 역시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는 어떤 믿음이 인식 주체의 정당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참인 이유를 그 자신이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 전제란 어떠한 믿음의 정당화도 인식 주체의 내적 상해에 좌우된다는 내재론적 관점에 입각하고 있다. 이러한 내재론적 관점에 따라 기초적 믿음이 참이라고 하는 이유를 인식 주체가 소유해야 할 것이 요구되기 때문에 이 요구는 무한하게 계속될 것이고 결국 내재론적 소급을 야기하게 되며, 이것은 자칫 미봉책에 불과할 수도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토대론 성립의 가능 근거라 할 수 있는 기초적 믿음의 자생적 정당화를 둘러싼 논란은 궁극적으로 내재론과 외재론의 대립 양상으로 그 논쟁의 성격이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기초적 믿음에 대한 자생적 정당성의 확보는 내/외재론의 대립이 말해주는 바에 따라 결정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두 관점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한, 토대론이 종말을 고했다고 선언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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